“이론도 없었어요. 돈도 없었어요. 하지만 사람이 있었어요.”
지역사회교육운동의 원로, 주성민 KCEF 명예이사장의 이 한마디를 읽는 순간 오래된 불씨 하나가 가슴속에서 살아났다.
그의 말에는 제도 이전의 믿음이 있었고, 정책 이전의 인간이 있었다. 그리고 그 믿음이 한 시대의 교육운동을 이끌었다.
반세기 전, 서울 재동초등학교 복도 끝 작은 공간에서 시작된 지역사회교육운동은 거창한 철학서로부터 태어나지 않았다.
타자기 한 대, 빌린 책상 하나로 출발한 이 운동은 사람과 사람을 잇는 관계의 힘으로 확장됐다. 학교의 문을 닫는 대신 열었고, 운동장을 비워두는 대신 아이들의 웃음으로 채웠다. 무엇보다 그 중심에는 언제나 ‘사람’이 있었다.
비빔밥의 철학, 함께의 교육
젊은 시절, 주성민 명예이사장은 면접장에서 물었다.
“지역사회교육운동이 뭐예요?”
그때 한 어른이 짧게 대답했다.
“비빔밥이야.”
그 말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었다. 각기 다른 재료가 모여 하나의 맛을 내듯, 교육은 다양한 사람들의 참여와 섞임으로 완성된다는 뜻이었다.
이른바 ‘비빔밥 철학’은 이후 지역사회교육의 상징이 됐다. 서로 다른 생각과 삶이 섞이되, 그 속에서 각자의 맛을 잃지 않는 조화. 그것이 공동체의 본질이자 교육의 목적이었다.
정책보다 사람, 그리고 정신
오늘의 사회는 수많은 정책과 지표로 교육을 논한다. 그러나 숫자와 효율의 언어 속에서 ‘사람’은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
지역사회교육운동의 역사는 그 반대편에서 출발했다. 형식보다 관계를, 제도보다 사람을 먼저 세운 이들의 이야기다.
그 시작점에는 주성민 명예이사장만이 아니라, 또 한 사람의 거인이 있었다. 바로 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다.
정주영 회장은 한국지역사회교육재단의 초대 이사장으로서, 산업의 영역을 넘어 교육이라는 또 다른 공동체의 터전을 일구었다. “현장은 학교보다 넓다”는 신념으로 지역사회의 배움을 산업적 성장의 토대와 연결시켰다. 돈보다 사람을, 제도보다 의지를 먼저 세우던 그의 철학은 지역사회교육운동의 뿌리에 깊이 스며들었다.
주성민 명예이사장은 그 출발부터 정 회장과 함께 걸었다. 한 사람은 현장에서 공동체를 일구었고, 한 사람은 그 길에 지역사회교육의 울타리를 세웠다. 그들의 신념이 만나 만들어낸 불빛이 오늘까지도 꺼지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
다시, 사람으로 돌아가야 할 때
나는 주성민 명예이사장의 인터뷰 내용을 읽으며 ‘교육의 본질이 어디에 있는가’를 다시 묻게 됐다. 교육은 제도가 아니라 관계에서, 시스템이 아니라 인간의 온기에서 시작된다는 단순한 진실 말이다.
돈도 없었고, 정책도 없었다. 그러나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들 덕분에 한 운동이 태어나고, 한 시대가 바뀌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언제나 사람을 믿은 정신, 정주영 회장이 남긴 불굴의 신념이 있었다.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도 아마 그것일 것이다. 새로운 제도보다 새로운 사람, 서로의 다름을 품을 수 있는 비빔밥 같은 교육철학.
지역사회교육운동의 역사는 오늘도 조용히 묻고 있다. “당신의 교육은 사람에게 닿아 있는가”
원종성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