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공학, 로봇공학, 인공지능, 나노기술과 같은 과학기술의 진보 속에서 전통적 휴머니즘의 인간중심주의는 해체되고 주체로서의 인간과 객체로서의 세계 상이의 경계는 허물어지고 있다. 이러한 시대적 변화를 대표하는 포스트 휴머니즘은 휴머니즘의 근원인 인간중심주의를 부정하고,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허물고 새로운 관계와 정체성을 추구하는 사상적, 문화적 흐름이다. 그것은 현실과 가상, 정신과 물질, 인공과 자연, 생명과 기계 등의 전통적인 이원론적인 구분을 해체하는 세계관이다. 포스트 휴머니즘에서 과학기술은 인간의 한계를 보완하는 도구가 아니라 정체성을 형성하는 기초다. 과학기술은 인간의 사고, 행동, 가치를 유도할 뿐만 아니라 제한한다. 삶의 조건을 구성하는 제 요소들과 사회적 실천도 과학기술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문자적으로 ‘포스트 휴머니즘’(post-humanism)은 전통적 휴머니즘을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이후’(post)를 사용하지만, 내용에서는 휴머니즘을 거부하는 ‘반’(anti)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디지털 기술의 진보는 산업과 경제, 사회 구조를 넘어 인간의 삶의 방식과 그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끼쳤다. 인공지능이나 사물 인터넷 등의 등장으로 인간은 타인이나 인간이 아닌 존재와 관계를 맺고 상호작용하는 방식의 변화를 겪고 있으며, 인간과 기계를 연결함으로써 정신과 육체의 기능을 확장하는 트랜스 휴먼을 통하여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인식도 변화하였다. 이제 인간은 모든 형태의 생명체와 과학기술에 연결되어 상호작용이 가능한 네트워크를 형성한다. 생명기술이나 정보기술의 발전으로 인한 인간의 기계화, 그리고 인공지능으로 상징되는 기계의 인간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포스트 휴머니즘의 관점에서 인간은 다른 형태의 생명이나 존재와 분리되는 예외적이고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다. 또한 인간이 아닌 존재들을 인간이 지배하거나 통제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기존의 생각도 부정한다. 인간은 다양한 형태의 생명체 및 과학 기술적 존재와 상호작용하며 관계를 맺어감으로써 인간과 관련된 세계의 의미를 형성할 수 있는 것이다. 메타버스는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허물고, 디지털 네트워크는 시공간의 개념을 확장하여 다양한 형태의 가상 주체를 창조하였으며, 생명공학은 인간의 신체를 교정하거나 보완하는 차원을 넘어 자연적 구조를 새로운 종으로 바꾸고 있지만, 인간성에 대한 정의의 기준과 평등성, 윤리적 책임, 기술의 오남용, 사회적 권리 보장에 대한 논의를 요구하고 있다.
포스트 휴머니즘은 인간중심주의를 넘어 모든 생명과 환경의 상호 연결성을 추구한다. 이러한 변화는 기술, 윤리, 정체성의 융합을 요구하며 공생의 질서를 위한 우리의 책임을 강조한다. 전통적 휴머니즘은 인간의 책임 영역을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제한했지만, 포스트 휴머니즘은 그 영역을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로 확장하였다. 하지만 포스트 휴머니즘은 자신이 전제하는 인간관과 세계관이 초래할 부정적 결과를 간과하고 긍정적 결과에 사로잡힌 낙관주의가 될 수 있다. 인간의 자연적 본성과 자율성이 과학기술의 효율성에 의하여 대체될 수 있다.
포스트 휴머니즘이 인간의 사회를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뿐 아니라 상대적으로 간과된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재정립하고 인간과 비인간의 권리와 책임을 위한 포괄적 원리를 제시해야 한다. 앞으로 인간과 생명공학, 컴퓨터 인터스페이스 기술의 결합은 갈수록 인간을 점점 더 사이보그적인 존재로 변화시킬 것이다. 또한 스스로 학습하고 사고하는 범용 인공지능의 발전은 인간으로부터 독립하여 자율적으로 추론, 판단, 선택을 수행하는 인공행위자가 될 것이다. 포스트 휴머니즘의 미래는 기술의 발전과 함께 인간의 가치와 도덕성에 대한 논의로부터 결정될 것이다.
홍순원 논설위원·(사)한국인문학연구원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