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대전 후 경제 복구와 국제적 통화 체제의 구축을 위한 브레튼우즈(Bretton Woods) 회의에서 미국의 달러가 세계 경제의 기축통화가 되었다. 브레튼우즈 체제는 금본위제도의 붕괴 이후 혼란해진 금융시장의 안정을 회복하고 보호주의적 무역규제를 철폐하여 국제무역을 활성화하려는 것이다. 처음에는 금환본위제도와 연계하여 35달러당 금 1온스로 교환하도록 규정했지만, 미국이 경상수지 악화로 ‘금태환’ 정지를 선언하자 금과의 호환성이 사라진 달러의 변동성이 커지게 되었다. 불안정한 달러를 금으로 교환하게 되면서 미국의 금보유고는 급감하고 기축통화의 불안정성은 증폭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유 변동 환율제가 시행되었고 달러는 지금까지 기축통화의 기능을 유지하고 있다.
국내적으로 화폐가치가 떨어지면 인플레이션이 발생하고 실질소득 감소, 양극화, 무역수지 적자를 유발한다. 반대로 화폐가치가 오르면 디플레이션이 일어나고 생산성 하락과 경기 침체가 일어난다. 국제적으로는 기축통화가 단일화폐처럼 세계 경제의 인플레이션과 디플레이션을 일으킨다. 세계 경제의 유동성 공급은 기축통화국의 경상수지에 영향을 받으며, 국제 유동성을 증가시키기 위해서는 기축통화국인 미국의 달러가 공급되어야 한다. 기축통화국은 유동성 공급을 위해 적자를 감수해야 하지만 반대로 적자가 지속되면 자국의 재정과 경쟁력이 훼손된다. 결국 미국의 경상수지의 적자가 누적되면 달러에 대한 신뢰성은 하락하고 유동성과 신뢰성 사이의 모순이 발생한다.
브레튼우즈의 기축통화 제도는 로버트 트리핀(R, Triffin) 교수의 지적처럼 유동성과 신뢰성의 딜레마를 안고 있다. 트리핀 교수는 미국이 경상수지 적자를 허용하지 않고 국제 유동성 공급 역할을 포기한다면 세계 경제는 크게 위축될 것이고 반대로 적자 상태를 지속하면 달러화 신뢰도가 하락한다고 경고했다. 국가별로 국제수지의 불균형이 발생하면 그에 따른 환율 조정이 필요하지만, 달러를 통한 획일화된 환율에 종속된다. 또한 미국발 금융위기에서 나타난 것처럼 미국의 경제적 상황에 따라 세계 경제가 지나치게 영향을 받을 수 있다. 따라서 기축통화국인 미국의 경상수지가 흑자이든 적자이든 세계 경제는 안전을 지속할 수 없으며 적자 폭이 급속하게 확대되는 현 상황에서 미국 경제의 위기는 곧 세계 경제의 위기다.
달러화 중심의 기축통화 체제는 달러의 무제한 발행을 허용하고 있으며 달러화 가치 변동에 따라 글로벌 금융시스템이 움직이는 태생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의 공격적인 금리 정책은 달러 가치를 강화하는 요인이지만 미국의 경제 침체, 세계 경기의 둔화, 전쟁을 통한 지정학적 불안으로 달러 가치 하락 가능성도 존재한다. 세계 국가들의 환율과 화폐 가치는 달러에 의존하기 때문에 국내의 경제 상황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미국의 경제 상황에 종속된다. 최근 들어 미국 달러는 변동성이 더욱 커지고 있다. 우리나라는 수출주도형 경제구조를 형성하고 있어서 환율변동에 더욱 민감하다. 기축통화로서 달러의 한계를 견제하고 극복하기 위해서는 준기축통화인 유로화, 위안화, 엔화를 통한 거래와 함께 대안적 통화 제도가 필요하다. 그것은 한, 중, 일의 통화 협력을 통한 아시아 지역통화권을 형성하는 것이다. 이미 3국은 700억 달러 규모의 통화스와프를 체결하고 거시경제적 협력을 시작했다. 유로화처럼 동아시아 통화 단위를 도입하면 달러화가 불안해도 아시아 국가들은 환율 안정과 거시적 경제적 안정을 도모하며 역내 거래의 지속과 세계 경제의 안정을 보장할 수 있다.
로마제국 시대에는 은화가 기축통화였지만 전쟁 비용 증가와 지도층의 도덕적 헤이가 결합해 은에 불순물을 섞은 은화를 유통하면서 로마제국의 붕괴를 초래했다. 미국은 막대한 경상수지 적자를 기록하면서도 달러 가치의 급속한 하락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동아시아 국가들이 수출주도 성장을 추구하는 한 달러를 저평가 상태로 둘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환율의 불균형은 투기성 금융자본을 형성해 자산 시장의 거품을 형성하고 금융시장 혼란을 초래했다. 따라서 우리는 환율 조정이 환율 조작으로 변할 가능성에 늘 대비해야 한다.
홍순원 논설위원·(사)한국인문학연구원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