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사회교육운동의 길을 만들어가다
“돈도 없었다. 정책도 없었다. 그러나 사람이 있었다.”

일인칭 서사의 감동을 느껴보았는가.
사람의 말맛에 웃다 울다 해본 적이 있는가.
말이 글이 되는 사람을 보았는가.
한 사람의 역사가 우리 모두의 역사가 된 사람을 만났다. 진짜 사람을 만났다. 바로 지역사회교육운동의 ‘줄기’ 주성민 명예이사장이다.
“돈도 없었어요. 국가 정책도 없었어요. 하지만 사람이 있었어요.”
주성민 명예이사장이 지역사회교육운동의 세월을 돌아보며 가장 먼저, 가장 오래 강조한 단어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만난 사람들은 나보다 남을, 개인보다 공동체를 먼저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다. 이 단체는 그런 사람들로 이어온 단체였다.
“우리가 NGO의 순수성을 지킬 수 있었던 것도, 지금까지 오랜 세월동안 이어올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사람 덕분이에요. 우리는 욕심이 없었어요. 이 일을 통해 출세하거나, 한 자리 하겠다는 사람들이 아니었죠.”
그녀의 말은 담담했지만 힘이 있었다. 이 운동이 반세기가 훌쩍 넘는 동안 꺼지지 않고 타올랐던 이유는 그 중심에 ‘사람’이 있었다.
시작의 시간, 그리고 만남의 첫 걸음
지역사회교육운동의 시작은 196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8월에 속리산에서 “Community Action in a Changing World” 라는 주제로 국제회의가 열렸는데 이 자리에서 소개된 영화 <To Touch A Child>는 참석한 사람들에게 많은 감동을 주었다. 이 영화를 보고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영화만을 위한 모임을 갖자고 하였고, 곧 주한 미국 공보원 스미스 부원장 집에서 영화 시사회가 개최되었다. 이 시사회에 누구를 초대할 것인가 구성하던 중, 그 영화 속에 등장한 인물들과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을 초대하게 된 것이다.
“그 영화를 보고 사람들이 영화에 등장인물과 같은 역할을 맡고 있는 사람들을 초대하자고 의견을 모은 거예요. 영화에 교장이 나오니 실제 교장을, 언론인이 나오니 실제 언론인을, 또 기업인이나 민간 지도자들을 각각 초대한 거예요.”
그 중 기업인으로 뽑힌 사람이 정주영 회장이었다. 당시 정주영 회장은 현대건설 사장이었다. 정주영 회장을 선택한 것이 지금 생각해도 놀라운 선택이었다. 교장, 신문기자, 민간단체 지도자등 약 20명을 영화시사회에 초대했는데 영화를 본 많은 사람들이 영화의 내용이 좋긴하나 우리나라 실정으로 불가능하다는 부정적인 의견이 대다수였다.
그 때 정주영 사장이 일어나 “나는 교육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하지만 우리나라 같이 가난한 나라에서 학교시설이라도 활용하지 않으면 언제 나라가 발전 하겠느냐”며 학교개방이 어렵다면 당신이 단양에 시멘트회사를 짓고 있는데 그 회사 시설이라도 주민들에게 개방해서 쓰게 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이 발언은 좌중의 분위기를 긍정적으로 바꾸었고 “힘들지만 필요한 일이다” 라는 것에 모두가 동의했다. 그 날은 통행금지 시간으로 헤어지기로 하고 9명의 운영위원을 선발하여 일주일에 한 번씩 회의를 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6개월 뒤인 1969년 1월 24일 영화를 본 20명이 한 사람씩을 더 초대하여 40명이 모여 ‘한국지역사회학교후원회’를 창립하기에 이른다.
“당시 운영위원으로 선출되신 분들은 모두 각계에서 대단한 분들이었다. 민간 지도자 중에서는 동아일보사 사장, 기독교방송 이사장을 지내고 이승만 대통령 시절에 문화공보부 장관을 지냈던 오재경 선생님이 참여하셨고 강우철, 이연숙, 정희경, 양순담, 김인자, 박순양, 윤길병, 김일주 등 논설위원, 대학교수, 전직 장관, USIS 직원 등 모두 바쁜 분들이었다. 후원회가 창립된 이후 실무를 맡을 간사를 선발하기로 했다. 그때 이연숙 선생이 자신의 모교를 통해 적임자를 추천해달라고 제안했다. 다른 대학에서도 추천을 받은 학생들이 있었다. 모두 17명의 후보들이 면접에 참여했다. 이화여자대학교에서는 졸업반 학생 중 한 명을 추천했다. 그 학생이 바로 스물네 살의 주성민이었다. 주성민 이사장은 당시 본인이 미 공보부에서 일하는 줄 알았다고 한다.
“처음엔 사무실도 없어서 YWCA 임친덕 간사의 방 입구에 책상을 놓고 일을 배우기 시작했어요. 당시 내가 했던 일은 운영위원들이 회의를 할 수 있도록 회의실을 준비해 놓고, 회의록을 작성해서 기록하고 점심을 잡수신다하면 점심을 주문하는 일이었어요. 그런데 이 분들이 매번 점심을 비빔밥을 잡수시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선생님 다른 메뉴도 있어요. 했더니 ‘아니야. 지역사회교육운동은 비빔밥이야.’ 하시는 거예요.
그 한마디가 그녀의 평생 철학이 되었다. 그녀는 그날 아무것도 모른 채 간사로 선발되었고, 그때 부터 교육운동의 첫 장에 이름을 올렸다. 그 분들은 일주일에 한 번씩 12시면 모여 꼭 비빔밥을 먹으며 회의를 했다. 비빔밥은 서로 다른 재료가 어우러져 하나의 조화를 이루듯, 각자의 역할이 모여 공동체의 힘을 만들어간다는 뜻이기에 너무 적절한 표현이었다. 이렇게 ‘지역사회교육운동’이 태동했고 정주영 사장이 초대회장을 맡았다.
YWCA에서 재동초등학교 복도 끝으로
처음엔 YWCA에서 회의를 하다 재동초등학교(당시 조광호 교장)가 제일 먼저 우리 학교가 이 운동을 해보겠다고 나섰다. 당시 재동초등학교도 도심에서 학생 수가 줄어들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교실 하나를 주민을 위한 교실로 꾸미고 그 복도 끝에 책상을 놓고 근무를 시작했다. 재동초등학교 복도 끝, 남루한 공간 한 켠에는 작은 책상, 타자기 한 대와 회의록 몇 장이 전부였다.
“그 때는 복사기도 없었어요. 밤늦게까지 타자를 치고, 서류를 들고 다니며 직접 설명했죠.”
그렇게 한 장, 한 장 쌓인 문서와 회의 기록은 훗날 지역사회교육운동의 체계를 세우는 밑거름이 되었다. 이후 본격적인 현장 실험의 무대로 재동초등학교에 문을 열었다. 학교 교실을 지역 주민에게 개방하고, 아이, 학부모, 교사, 지역주민이 함께 배우는 프로그램이 시작된 것이다.
“자, 재봉틀 안 쓰는 집 내놓으세요. 소파 있는데 안 쓰는 집 내놓으세요. 냉장고 안 쓰는 것이 있으면 내놓으세요.”
“학교에서 기타도 가르쳐드립니다, 붓글씨도 가르쳐드립니다.”
제일 먼저 한 일이 중고 물품으로 커뮤니티 룸을 채우고 그 교실에서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주민들에게 요구조사를 하여 프로그램을 만들고 안내지를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뿌렸다. 천 장을 뿌려서 다섯 명이 오면 많이 오는 것이었다. 그렇게 1969년, 하나의 시사회로 시작된 작은 움직임이 사람과 만남, 그리고 공동체로 이어지는 한국 지역사회교육운동의 첫 장이 되었다.
오후 3시의 운동장
“그때 우리가 정말 잘한 일이 하나 있었어요. 학교는 오후 3시면 문을 닫고, 아이들은 위험한 찻길로 내몰렸죠. 그런데 운동장은 텅 비어 있었어요. 말이 안 되는 일이었죠. 그래서 학교 운동장을 어린이들의 놀이터로 활용을 하자고 했는데, 아이들이 신나게 뛰어놀기 시작하자, 학교에 웃음소리가 가득해졌어요.”
아이들이 놀다 보니까 아니나 다를까 안전사고에 문제가 생겼다. 유리창도 깨뜨리고 이렇게 문제가 생기니까 그때 우리가 생각한 것이 대학생 자원봉사자를 양성해서 지도자로 내세우자는 것이었다. 그때 마침 경희대학교 체육학과 학생들이 놀이터마다 다니면서 놀이 지도를 해주고 있었다. 그 팀하고 연결이 되었다. 그때 제일 먼저 한 사업이 대학생 자원봉사자 훈련이었다. 바로 청소년 자원봉사자가 생긴 것이다. 그때 놀이 지도를 했던 학생이 나중에 재단의 5대 이사장이 된 유승희 이사장이다.
인터뷰 및 글 : 김일규 / 사진-영상 : 이미호